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카라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402년, [[바예지트 1세]]는 권세의 절정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세르비아 공국]]과 [[불가리아 제2제국]], [[그리스]] 북부 일대를 완전히 제압했으며, 1394년에는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 공국]]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비록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가 1만 명만을 이끌고 오스만군 5만여 명[* 오스만군 4만에 세르비아 봉신들의 군대가 8천~1만.]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북진을 저지했지만(로비네 전투), 그의 군대 역시 피해를 입었기에 헝가리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유럽 각국은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 십자군을 형성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완파당했다. 바예지트 1세는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아나톨리아 베이국|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계 공국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비록 1394년부터 시작해 8년여를 끈 [[동로마 제국]]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아직도 가망이 없었지만 그런 것쯤은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기세등등한 상태였다.[* '사소한 일' 정도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자체를 신경쓰지 않았다고 하는 게 옳다. 처음에 몇 번 두들겼지만 잘 안 된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포위만 할 뿐, 공격은 감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 '''문제는, 오스만의 동쪽에는 이런 기세를 훨씬 능가하는 [[티무르|희대의 정복자]]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동쪽의 정복자 [[티무르]]는 [[티무르 제국|자신의 제국]]을 한창 완성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마르칸트]]에서 처음 거병하여 30여 년 동안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워 이긴 끝에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에서 동쪽으로는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는 다음 목표인 [[서아시아]] 평정을 위해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그 무렵 바예지트는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 대부분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이 이르렀으니 전성기를 누리는 이슬람 세계의 두 강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게 된 상황에서 티무르와 바예지트, 두 사람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이미 1400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창 서아시아를 평정하고 있던 티무르에게 갈려버린 [[잘라이르 왕조]]의 술탄 아흐마드와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는 티무르르 피해 오스만으로 달아났는데 티무르가 이 둘의 송환을 요구하자 바예지트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이 있었다. 한편 아나톨리아를 평정하려는 바예지트의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튀르크계 공국들은 동쪽의 티무르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는데, 특히 바예지트가 동아나톨리아의 [[에르진잔]]을 점령하고 에르진잔의 에미르 무흐타르탄이 티무르에게 망명하자, 이에 티무르가 바예지트 1세에게 오만하고 위협적인 경고를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오스만이 이미 쳐 없앤 공국들을 모조리 재건하는 동시에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신하가 되라는 소리였다. 이는 몽골이 오스만이 독립해 나온 [[룸 술탄국]]을 신하국으로 삼았던 일을 근거로 한 것이었지만, 오스만의 입장에서 이 말은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기세등등했던 바예지트 1세가 이를 가볍게 무시하자 티무르는 오스만이 점령한 에르진잔을 함락시켜 무흐타르탄을 복위시킨 다음 본보기로 오스만 동부의 국경도시인 [[시바스]]를 공격하여 잿더미로 만들고[* 다만 티무르가 시바스를 잿더미로 만든건 티무르가 시바스에서 생애 처음으로 [[나병]] 환자를 보고 자신의 군대에 나병이 퍼질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 도시를 지키던 수비병 4천여 명을 생매장시켰다. 이에 분노한 바예지트는 티무르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쪽으로 출정을 결정하였다. 한편 티무르는 시바스에서 서쪽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길로 티무르는 1400년에서 1401년에 걸쳐 시리아를 유린하였는데 시리아를 유린한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로 회군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술탄 아흐마드는 다시 이라크로 돌아왔는데 사실 사마르칸트로의 회군은 티무르의 함정이었고 티무르는 곧바로 남하하였다. 깜짝 술탄 아흐마드는 다시 오스만으로 도망쳤고 그길로 이라크를 유린한 티무르의 군대는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티무르가 신나게 이라크를 털어먹고 있을 그 사이 동쪽으로 진격한 바예지트는 시바스와 에르진잔 등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였다. 원정을 마친 티무르는 바예지트에게 술탄 아흐마드와 카라 유수프의 송환을 재차 요구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자 두 사람은 수 차례에 걸쳐 모욕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설전을 이어간다. 1402년 초 티무르는 다시 원정을 시작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사기와[* 티무르의 고민 중 하나가 군대에 줄 봉급이 자꾸 밀린다는 것이였는데, 시리아랑 이라크 원정을 통해 밀린 봉급을 모두 지불하고도 한참 남을 정도의 부를 획득했다.]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인도 원정에서 얻은 코끼리 부대를 포함해 대부분의 부대가 오랜 기간 전장에서 단련되었으며,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전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다.] 이 군대가 향할 곳은 드디어 그 바예지트가 다스리고 있는 오스만 술탄국이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 앞서 티무르는 [[캅카스]]의 [[조지아]]를 공격했으며 이 조지아 원정은 티무르에게 간만에 '[[지하드]]' 의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자마자 티무르는 곧바로 동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에야 말로 티무르와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 바예지트는 수년 동안 계속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마저 포기한 후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중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인 [[앙카라]]에 도착한 바예지트는 참모들과 향후 전략에 대해 논의했는데 참모들은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이곳 앙카라에서 티무르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간언했으나 바예지트는 티무르의 군대가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히 들어오기 전에 국경의 산지에서 요격하자고 주장했고 앙카라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후 동쪽 시바스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사이 티무르는 기동력이 뛰어난 자신의 군대의 강점을 이용해 [[카이세리]]로 우회하여 비밀리에 오스만 영토 안으로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는데 성공해 바예지트의 허를 제대로 찔렀고 곧바로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앙카라에 나타나 앙카라를 포위했다, 바예지트는 토카트에서 티무르의 분견대와 교전을 벌이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깜짝 놀란 바예지트는 앙카라로 황급히 회군했다. 그리고 7월 27일 앙카라를 포위하며 여유롭게 바예지트를 기다리던 티무르는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전속력으로 회군하느라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며 진이 빠진 오스만군을 맞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